키친테이블라이팅 문예지 ⟪영향력⟫ 편집‧공동발행인으로 활동했다. 시집 『오래 미워한 사람에게』, 사진단상집 『작별의 옆모습』(공저)을 출간했다.


국악기라고 하면 가야금이나 꽹과리, 장구 같은 것만 떠올리던 나는 서민기의 공연을 접하면서 ‘생황’이라는 악기를 처음 알게 되었다. OURS의 공연 전, 서민기의 다른 공연을 통해 처음 본 생황은 악기라기보다 차라리 무기에 가까워 보였다. 한 손으로 들기에는 무거워 보이는 외관에 여러 개의 죽관이 둥글게 꽂혀 있는 형태로, 두 손으로 받쳐 들다시피 해서 연주하는 모습은 다른 그 무엇보다 나를 압도해버렸다.

나는 내 목소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때 평소보다 조금 더 큰 목소리를 내야 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목소리는 늘 떨리고 호흡은 가빠지고 말아서 본의 아니게 격양되고 감정적인 소리로 메시지가 전달된다는 것에 있었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말하고 되도록 작고 낮게 말하려고 노력한 건 최근 들어서지만 마스크까지 더해져 작게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아무 말도 내뱉고 싶지 않다고 느낄 때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런 목소리로 내가 쓴 글을 읽고, 대답을 하고, 이름을 부른다. 큰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떨리는 건, 하나의 목소리로 전해질 수 없는 마음들이 목소리에 달라붙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문자나 이미지를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을 수 있었던 마음이 목소리를 통해 비집고 나오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대화 속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도,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전화 통화 대신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모두 그런 경험의 일부이다.

서른일곱개의 죽관을 통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어떤 마음은 저렇게 많은 갈래로 나올 수밖에 없다고, 그러면 그 마음은 과연 어떤 것인지 악기의 외형을 지나 소리에 주목하게 된다. 하나로 매끈하게 재단된 소리가 아닌 여러 개의 관으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나오는 소리. 들숨까지 여과 없이 연주되는 소리를 들으며 소리는 진동에 의한 파장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한다. 어쩌면 나는 나의 진동을 누가 알아차려 주길 바랐던 걸까.

서민기의 공연 OURS는 ‘하얀 시간’을 제목으로 단 연주로 마무리된다. 흰색은 소거의 색이기도 하지만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는 백지의 상태기도 하다. 모든 것들이 멈춰 버리면 그 속에서 또 어떤 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의 모든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온 그에게 “모든 것이 멈춰버릴 것 같은” 그 하얀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멈춰버릴 것 같은’ 가정의 시간 속에서, 멈추기 직전의 상태는 어쩌면 그가 계속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황을 연주하는 그의 곁에서, 다양한 악기로 연주되는 공연 속에서, 무수한 책임과 감정 속에서 발화되는 여러 겹의 목소리를 가진 나 또한 하나의 음악이 되어 그곳에서 함께 진동했다. 내게는 죽관 같은 하나의 목소리가 더 생겼고, 새로운 목소리가 추가되어도 더는 혼란스럽지 않다. 그것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고, 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한 명의 연주자로 또 다른 청자들을 만나며 미세한 진동들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3040칼럼] ‘나'라는 악기를 통해 드러내고 연대하기